종이를 지니고 다녀야 할 이유
2023-06-10

소명 중고교에 다니는 이름 모를 소년. 검은색 반팔 티와 펑펑 한 일자 청바지, 그리고 바지에 가려 앞 코만 보이는 검은색 캔버스 운동화. 무언가 가득 들어 빵빵해진 남색 가방을 두 다리 사이에 무심히 내려놓고는 도서관에서 빌린 파란 책을 펼쳐 든 그 친구에게 나는 자꾸만 관심이 갔다. 옷이며 표정이며 꾸밈없이 단정하고 수수한 모습에 어딘가 모르게 느껴지는 자유와 열정. 이는 필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으로서의) 분위기였다. 한 손으로 펼쳐든 책의 이름은 ‘웹툰, 웹 소설 작가 되기’. 

밤 열 시의 지하철, 운이 좋게 자리에 앉았다. 휴대폰이 방전된 탓에 잡다한 생각으로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다가 내 앞에 갑자기 나타난 이 소년을 발견하고는 문득 편지를 써주고 싶은 강한 충동에 휩싸였다.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종이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근데 있지 얼마나 강한 충동이었냐면, ’저 가방 속에는 분명 공책이 하나쯤은 들어있을 텐데 한 장만 빌릴까.’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펑펑한 바지를 훌렁훌렁 긁으며 종종 두리번거리는 산만함이 귀여웠던 어린 친구는 아마도 굉장히 어리둥절해 했겠지. 지하철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이 대뜸 희한한 말들을 적어 쪽지를 건네니 말이다. 그래도 이 소년이라면 내 편지를 책상 어귀 어딘가에 간직해 줄 것만 같은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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